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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레닌의 키스(옌롄커 著) 감상평 본문

기록하고 싶은 '문학'/중국소설

[책리뷰] 레닌의 키스(옌롄커 著) 감상평

Geronimo 2021. 10. 4. 06:59

ㅇ 책 제목 : 레닌의 키스(受活)

ㅇ 저자 : 옌롄커(閻連科)

ㅇ 출판사 : 문학동네


추석 전에 빌린 책을 이제서야 다 읽었다. 책을 읽을 시간은 있었지만, 반대로 여유는 없어서 방 한쪽에 책을 내버려 둔 채 회피했던 것 같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와 '딩씨 마을의 꿈'을 읽고 나서, 옌롄커라는 작가에 대한 관심은 더 커졌다. 화려한 미사여구나 독특한 설정과 같은 특별함은 그의 소설에 없지만, 대신 평이하면서도 잔잔하게 흘러가는 소설 속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은 묵직하게 느껴져서 그의 소설을 계속 찾게 되는 것 같다. 국내에 출간된 옌롄커의 책 중 아직 읽지 못한 것도 많고 최근 그의 신간이 국내에 출간된 것 또한 인지하고 있지만, 왠지 과거 작품부터 읽어야 그가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바러우 산맥에 위치한 서우훠(受活) 마을에는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 등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모여 산다. 마을의 연장자이자 많은 사람이 따르는 마오즈 할머니는 과거 홍군 출신의 여간부였지만, 전투에서 패배하여 헤매던 중 서우훠 마을에 살던 석공과 결혼하여 서우훠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마을에 불었던 혁명의 바람에 이끌려 마오즈 할머니는 서우훠 마을이 인민공사에 가입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지만, 강철재앙, 대흉년 등을 겪으며 마을이 빈곤해지자 마을 사람들의 원망과 비난이 향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마오즈 할머니는 평화로운 서우훠 마을에 불행을 가져온 혁명을 점점 적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인 류잉췌는 사회주의를 가르치는 학교의 선생에게 양자로 입양된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 등 사회주의자의 업적과 철학 등을 배웠고, 관료인의 길을 걸으며 빠르게 현장으로 승진했다. 밀이 익어가던 어느 해 여름 눈이 내려 서우훠 마을이 피해를 입자, 류 현장은 마을을 구제하고 지원하기 위해 서우훠 마을을 방문한다. 마을에서 진행된 현장 방문 기념 행사이자 축제에서 서우훠 마을 사람들은 나뭇잎에 자수를 놓거나 귀 옆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등 갖은 장기를 선보이는데, 가난한 현의 발전을 위해 레닌의 유해를 구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류 현장은 서우훠 마을 사람들을 공연단으로 조직해 그 입장료 수입으로 그의 계획을 현실로 옮기고자 한다.

이후 소설은 혁명에 적대적인 마오즈 할머니와 레닌의 유해를 러시아로부터 가져와 부를 성취하고 개인의 야망을 이루려는 류 현장의 갈등을 그려낸다. 물질적 부를 얻기 위해 서우훠 마을 사람들은 마오즈 할머니의 충고를 무시하고 공연단을 꾸리고 여러 도시를 방문하며 공연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는 돈과 정신적 상처뿐이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그 누구도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지 못하게 된다.


우선 일반적인 책들과 다르게, 이번 소설 「레닌의 키스」에서는 어려운 용어나 설명이 필요한 단어에 대한 설명이 각주가 아닌 미주(尾註) 형식으로 추가되어 있다. 소설의 흐름상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미주의 절반 정도는 소설의 내용이나 시대 배경과 연관된 것이어서 그 양이 상당하다. 그래서인지 각주가 아닌 미주로 처리되어 있고, 일정 부분마다 해설이라는 형식으로 추가되어 있다.

초반에 책을 읽을 때는 미주 형식으로 되어 있는 해설이 익숙하지 않아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소설에서 '권'으로 구분된 부분 그리고 미주가 홀수 번호로만 매겨져 있는 것도 의아했다. 작가가 특별한 의도를 두고 홀수 번호만 매겼는지 아니면 (책의 목차를 보지 않은 채) 책의 후반부에 짝수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만 별도로 기술되어 있는지 그 의중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책을 다 읽은 다음에 중국인의 짝수 선호 문화를 알게 되니, 왜 옌롄커가 홀수 번호만 의도적으로 등장시켰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홀수 번호만 등장한다는 것으로부터, 이 소설의 끝은 비극이 됨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전에 읽었던 「딩씨 마을의 꿈」과 비슷한 구도로, 이번 소설 「레닌의 키스」에서도 물질적 부를 좇던 서우훠 마을 사람들과 류 현장은 행복한 엔딩을 맞이하지 못한다. 다만 욕망을 추구하던 인물들과 갈등을 겪는 마오즈 할머니의 존재감은 「딩씨 마을의 꿈」에 등장했던 딩수이양 할아버지보다 조금은 약해 보인다. 더불어 딩수이양이 끝까지 저항했던 것과 달리, 마오즈 할머니는 일정 수준 현실에 적응하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마오즈 할머니가 처한 상황에서 그 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돈 또는 자본주의가 주는 압박은 오늘날 점차 더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기에, 마오즈 할머니의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며, 오히려 딩수이양 할아버지의 대응이 오늘날 더 보기 힘들고 인상 깊게 뇌리에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의 역병'이라는 부제가 붙은 한국어판 서문, 그리고 본래 있었던 책의 서문과 후기를 통해, 옌롄커는 현실주의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현실의 고통, 아픔, 혼란, 혼돈 등을 작품에 녹여내지 못하면, 문학 자체가 붕괴하고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생각에 100% 동감한다. 그가 그려낸 중국의 실상은 모든 사람이 쉬쉬하고 이야기하기 싫어하는 모습이기에, 왜 그의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강하게 나뉘는지 그리고 왜 중국이 그의 작품 대부분을 금서로 정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진실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또다른 진실을 옌롄커가 이번 소설 「레닌의 키스」를 비롯해 여타 다른 작품에서 충실히 그려내고 있기에, 그가 이야기하는 삶의 소중함, 아름다움, 사랑 등을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감상평>

서우훠 마을에는 다시 새파란 풀이 자라고 알록달록한 꽃송이가 피겠지만, 그 모습과 분위기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레닌의 키스'라는 제목보다, 원제이자 마을 이름인 '고통 속의 즐거움(受活)'이 책의 내용을 더 잘 반영하는 것 같다.

다소 허황된 목표를 이루려는 개인과, 돈이라는 물질을 좇아 평화로운 마을을 떠나 거친 현실로 뛰어드는 다수의 인물,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강하게 맞서다 현실에 순응하고 결국에는 후회만 거듭해서 내뱉는 인물의 모습이 처절하게 소설 속에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들 모두 각자의 삶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지만, 그 즐거움은 책의 제목처럼 고통 속에서 느낀 아주 작은 즐거움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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