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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 : <1> 국회의 탄생 본문

기록하고 싶은 '비문학'/1789(주명철 著)

1789 : <1> 국회의 탄생

Geronimo 2021. 3. 22.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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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10부작 - 2. 1789 - 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 | 주명철(지은이) | 여문책

<차례>
  01. 국회의 탄생
  02. 바스티유 정복
  03. 인간과 시민의 권리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두 번째 책인 '1789'를 읽고 있다. 2권은 1789년 5월 전국 신분회가 모인 시점부터 시작해 이후 정치적/사회적 앙시앵레짐을 파괴하고, 문화적 앙시앵레짐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2권의 1부에서는 국민의회의 성립 그리고 절대군주정으로 대표되던 정치적 앙시앵레짐이 파괴되는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1789년 5월 5일 공식적으로 전국 신분회가 개최되었다.
  - 소락청(L'hôtel des Menus-Plaisirs)에는 종교인 대표 291명, 귀족 대표 270명, 제3신분 대표 578명을 포함한 약 3천 명의 인원이 모였다.
  - 루이 16세는 악화된 재정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슬기로운 의견을 모으기 위해 전국 신분회를 개최했음을 알리는 동시에, 각 신분의 대표들이 자유롭게 합의하되 그 결과물은 왕의 허락 하에 시행될 수 있음을 공표했다.
  - 전국 신분회를 개최하겠다고 공고한 시점부터 제3신분의 관심사였던 개인별 투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는 지금까지 가장 큰 희생을 감수했던 제3신분의 반발을 일으켰다.

ㅇ 제3신분 대표들은 베르사유 궁에서 왕을 알현한 5월 2일 이후 닷새 동안 앙시앵레짐의 신분제도라는 장벽을 넘지 못했다.
  - 신분별로 회의실이 배정되어 있었고, 각 신분 대표들은 따로 회의를 진행했다.
  - 대표들의 자격 심사와 관련해서 귀족은 신분별로 따로 진행할 것을 주장했고, 제3신분은 다 같이 모여 함께 진행할 것을 주장하며 팽팽한 대립을 이어 나갔다.
  - 귀족은 제3신분을 무시했으나 종교인 가운데 하위 성직자들은 제3신분에게 우호적이었고, 여론 또한 제3신분 대표들의 편이었다. 

ㅇ 제3신분 대표들은 전국 신분회 대신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선포했다.
  - 그들은 국민은 여러 계급의 시민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특권 계급의 대표들이 참석하지 않았다고 해서 국민을 형성할 수 없다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았다.
  - 과거 재무총재 네케르가 전국 신분회의 세 신분 대표들이라는 의미로 국민의회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그 의미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되었다. 법이나 왕에게 복종만 하는 '국민(sujet)'으로 이루어진 신분 사회의 대표들이 모이는 신분회가 아니라, '전체 국민'의 대표들이 주축이 되어 국가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하는 '국민(citoyen)'이 모인 기관을 지칭하는 의미로 바뀌었다.
  - 더불어 제3신분은 '평민(communes)'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 제3신분이 전국 신분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제3신분의 대표수를 2배로 늘려 그들의 힘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힘을 전략적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루이 16세의 전략은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의 결과물을 낳았다.

ㅇ 국민의회는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 귀족 대표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에만 신경 쓰는 상황이었고, 왕이 특권층과 함께 신분별 투표를 지지한다 하더라도 대세는 국민의 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 왕은 군대를 배치하며 평민 대표들을 간접적으로 압박하였고, 국민의회를 인정하지 않으며 전국 신분회를 직접 이끌어가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쳤다.
  - 군인을 이용해 소락청의 제3신분 회의실을 폐쇄하자, 평민 대표들은 죄드폼으로 자리를 옮겨 '우리가 모이는 곳은 어디든 국민의회가 될 수 있음'을 맹세하였다.

ㅇ 상황이 이렇게 되자 왕은 절대군주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 왕은 회의의 참관자들이 평민 대표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음을 인지하고, 6월 23일 군대를 집결시키고 회의실에 일반인을 들이지 않으며 평민 대표들을 고립시켰다.
  - 더불어 종교인과 귀족이 평민에게 휘둘리지 않는다면, 원래 목적대로 전국 신분회의 기능을 되살려 기존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계산했다.
  - 왕은 연설을 통해 제3신분 대표들이 결정한 사항은 무효이며, 단지 국가 재정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의견만 낼 수 있음을 강조했다. 더불어 자신의 의지를 거스르는 사람을 프랑스 백성으로 취급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국민의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 국민의회는 '국회의원은 신성한 존재'임을 선포하며 왕의 의지를 꺾었다.
  - 이로써 전국 신분회의 제3신분은 국민의회의 평민이 되었고, 왕과 같은 신성한 존재가 되며 혁명의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 결국 절대군주정으로 상징되던 정치적 앙시앵레짐은 1789년 6월 23일을 기점으로 파괴되었다.


1부는 1789년 5월부터 6월 말까지 약 2개월 동안 발생한 사건과 그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2개월이라는 기간이 그리 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 기간 동안 제3신분이 국가의 문제를 비롯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능동적인 시민(citoyen)이 되어가는 과정을 차례차례 엿볼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여러 사료가 본문 중간중간 언급되어 있는데, 국민의회도 처음에는 하나로 통일된 의견을 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국민의회가 주장했던 것이 오늘날에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귀족과 특권층에게는 제3신분의 움직임이 큰 변화 혹은 반항으로 보였으리라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왕 루이 16세는 군 병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도와 상반된 행보를 보이던 국민의회를 강제 해산할 수도 있었으나, 이를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책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대중과 여론의 반발을 의식했으리라 추측은 가능하지만, 21세기에 그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읽을 수는 없기에 어디까지나 추측에 머무른다.

2부 '바스티유 정복'에서는 파리와 국민의회 사이의 의견 교환 그리고 민병대를 갖추어 바스티유 감옥을 정복(또는 점령)하는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국민의회와 이를 인정하지 않던 루이 16세 사이의 갈등 그리고 대중이 그들의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남은 내용도 큰 기대를 가지고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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