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의 물리학 : <1> 최초의 물질 이론
물질의 물리학 - 고대 그리스의 4원소설에서 양자과학 시대 위상물질까지 | 한정훈(지은이) | 김영사
자연과학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는 일반 교양서를 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복잡한 수식이 들어가거나 내용이 너무 심오해지면, 소위 대학교재 또는 전공서적이 되어 일반인이 책을 쉽게 읽기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너무 가벼운 이야기만 담는다면 굳이 책을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간단하고 평이한 자료는 굳이 책이 아니어도 인터넷이라는 편리한 매체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연과학 중에서도 물리학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임이 분명하다.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에도 여러 분야가 있지만, 추측컨대 대다수의 일반인은 우주의 원리와 그 구조를 설명하고 있는 일반 교양서를 찾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떠올리지 않을까?
칼 세이건, 미치오 가쿠 등이 다수의 대중서를 출간했지만, 우주를 설명하고 이를 자세하게 서술하는 국내 학자가 출간한 책은 찾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우주가 아닌 물질과 관련된 물리학 책이라면 더더욱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성균관대 물리학과 한정훈 교수가 쓴 「물질의 물리학」이라는 책의 표지를 보았을 때, 다른 책들보다 반갑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총 9개의 장으로 구성된 「물질의 물리학」은 원자부터 시작해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양자역학 그리고 생소한 위상 물질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룬다. 1장 '최초의 물질 이론'에서는 물질이라고 불리었던 대상에 관한 관찰과 추론을 시간순으로 기술하고 있다.
ㅇ 엠페도클레스
-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 흙, 공기, 물 4가지 원소의 조합으로 만물이 구성됨을 주장하였다.
- 4가지 원소가 서로 결합하거나 분해되어 물질이 형성되거나 붕괴된다고 보았다. 물질이 결합하는 힘은 사랑, 물질이 분해되는 힘은 미움/갈등으로 해석한 인본주의적 관점이 깔려 있다.
ㅇ 데모크리토스
- 작은 물질을 쪼개어 나갈 때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그 무엇'이 존재하며, 이를 원자라 칭했다(원자설의 등장). 더불어 만물은 무한히 많은 종류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 엠페도클레스와 달리, 데모크리토스는 자연법칙에 따라 서로 결합하고 분해된다는 기계론적 관점을 취했다.
- 그가 주장한 원자의 존재 자체와 기계론적 상호작용 이론은 오늘날 현대 과학의 관점과 일치한다.
ㅇ 플라톤
- 그의 저서 <티마이오스>에서 과거 엠페도클레스가 주장했던 4원소설의 합당성을 주장했다.
- 여기에 한 술 더떠, 4원소설에 등장하는 원소와 3차원 정다면체 사이에 일대일 대응 관계가 존재함을 주장했다(정사면체 - 불, 정육면체 - 흙, 정팔면체 - 공기, 정십이면체 - ??, 정이십면체 - 물)
- 위에서 4가지 원소와 대응된 4가지의 정다면체는 직각 삼각형으로 만들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하면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이십면체의 기본 구성 도형은 정삼각형과 정사각형인데, 이 2가지 도형은 모두 직각 삼각형을 조합해 만들 수 있다.
- 직각 삼각형으로 만들 수 없는 정오각형으로 구성된 정십이면체는, 특정 원소에 대응시키지 않고 물질 세계를 감싸는 하늘의 모양에 대응시키는 애매한 해석을 택했다.
- 물질은 위에서 언급한 정다면체의 조합이며, 물질의 변환은 기본 도형의 이합집산으로 해석했다.
- 대칭성을 지닌 정삼각형과 정사각형을 도입하며, 물질을 해석하는 데에 수학적 사고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 하지만 물질의 다양성을 정다면체의 크기가 다름에서 비롯된다는 해석, 물질 사이의 상호 작용을 신의 의지로 간주한 것 그리고 정다면체를 기본 구성 재료로 보았기에 물질을 3차원적 요소로 간주한 것은 플라톤이 제시한 이론의 한계로 평가된다.
고대 그리스의 물질 이론 이후 괄목할 만한 발전은 없었으나, 20세기 양자역학 이론의 등장과 함께 제대로 된 물질 이론이 하나씩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 학자들은 허튼 일을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당시 그들에게는 충분히 많은 과학적 도구들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세상을 향해 던진 과학적 질문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으며, 오늘날 과학자들은 과거 학자들이 한 일의 연장, 그들이 저지른 오류의 수정 아니면 그들이 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거나 이를 일반화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자를 해석하는 관점은 과거 4원소설부터 시작해 원자론 그리고 오늘날에는 쿼크, 전자, 광자 등 소립자라는 개념까지 만들어 냈는데, 소립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물질의 변화를 이해한다는 틀 자체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과학은 과거 학자들이 해석하지 못하거나 신의 의지로 간주했던 모호한 부분을 치밀한 수학적 언어로 채우고 있다.
1장 '최초의 물질 이론'은 이후의 이야기를 위한 도입부이다. 원자라는 개념의 역사와 그 발전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실 이는 고등학교 화학 또는 다른 물리 교양서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보다도 과거 학자들의 작업과 이들이 던진 질문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고, 오늘날 과학자들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예전에는 없었던 여러 과학적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 저자의 관점이 인상 깊었다.
이외에도 플라톤이 제시했던 이론도 흥미로웠다. 일부 허점이 있긴 하지만, 4원소와 수학적 개념을 대응시킨 것은 다소 놀라웠다.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대칭성을 사랑했다면, 오늘날 물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또한 대칭성과 일반화를 사랑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